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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2009. 1. 24. 1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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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 |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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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작가에 대한 존경과 실망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하게 된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비의 사회>는 문제작이라고 부를 만 하군요. 막스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네오막시스트적인 철학으로 사회의 통념을 철저하게 까발리는 점은 대단합니다. 특히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본질을 꿰뚫는 눈은 과연 대가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합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이 만든 논리에 덫에 휘말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저뿐이 아니겠지요. 천재가 가지는 천재성은 그 천재를 광기로 이끈다고 합니다. 책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놀랍지만 두려운 책’이라는 점은 그를 ‘무서운 아이’로 지칭하는 학계의 관점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혹은 인식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극단까지 밀고 가는 보들리야르. <프라하의 학생>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그는 객관적 논리를 철저히 밀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뿌리를 둔 사회학은 굉장히 복잡한 변수의 세계입니다. 역사학과 인류학, 문화학, 정치학 등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해서 “틀렸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오만입니다. 그가 후기에 기호학과 형이상학으로 경도된 것 또한 이러한 학문적 편협성 때문이 아닐까요.

안녕하십니까. ‘명사와의 티타임’ 정원엽입니다. 오늘은 프랑스 구조주의의 총아이며 형이상학과 철학에 깊은 사유로 유명하신 사회학자 쟝 보들리야르씨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엽 : 안녕하십니까. 보들리야르 씨. 반갑습니다.

쟝 : 안녕하세요. 편하게 쟝이라고 부르시지요.

엽 : 네. 쟝 선생님. 요즘 TV를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TV나 대중문화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계시니 안 보시나요? 아니면 혹시 ‘적의 화장법’을 알기 위해 즐겨 보시나요?

쟝 : 그런 만들어진 세상은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진위와 무관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세계는 허위일 뿐이죠.

엽 : 시작부터 너무 어렵게 시작하시네요. 아, 저는 최근에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까지 제작된 이야기지요.

쟝 : 그것이야 말로 하나의 컨텐츠로 자본이 어디까지 상업화 하며, 그것을 기호화 하여 소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군요.

엽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역설적이게도 쟝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소비’에 대한 부분을 이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말씀 드렸습니다. 3화쯤 이었나요? 남자주인공인 구준표가 여자주인공인 금잔디에게 이런 말을 하죠. “돈으로 살수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해?” 금잔디는 곰곰이 생각하지만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합니다. 다른 주인공인 윤지후가 “공기”라고 대답하죠. 금잔디는 이해가 간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공기 또한 돈으로 살 수 있고 또 소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유럽의 삼림욕을 여행패키지로 구매하는 행위, 혹은 거시적으로 기후변화협약이나 탄소배출권거래 같은 이야기도 공기마저도 소비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니까요.

쟝 : 실제로 그러하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시장으로 편입된 이후 끊임없는 소비에 의해서 구성되고 운영되어 왔으니까. 비단 공기 뿐 아니라 우리는 이제 미소나 감정 같은 ‘배려’까지도 소비하고 있습니다. 우정이나 사랑, 희망과 같은 관념적인 단어도 기호화 하여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라니까요.

엽 :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실재하지 않는 개념들이 어떻게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죠?

쟝 : 상품이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실재로 풍부하다면 희망이라는 단어의 가치는 그렇게 까지 높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사회는 인간관계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따뜻함을 그리워하고 따뜻함을 소비하게 되구요. 현재 소비사회에서 따뜻함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고 상품화를 통한 소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엽 : 아. 광고시장에서 감성마케팅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그런 결핍을 이용한 판매겠군요.

쟝 : 물론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결핍은 드러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부함으로 위장하고 있지요. 풍부함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소비사회는 마치 위협받고 포위된 풍부한 예루살렘 같은 거라 할 수 있죠.

엽 : 아. 실제로는 전쟁과 충돌 위협으로 가득한 예루살렘이지만, 내부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생각 되어진다는 말이군요.

쟝 : 맞습니다. 풍부함의 신화를 다른 논리로 꿰뚫어 봐야지만 단순한 계량적인 풍부함의 허구를 알 수 있습니다. GDP의 과장된 풍부함을 보셨죠?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구별되지 않고 수치의 증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이들은 성장이라는 신화를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승화시킵니다. 성장을 통해서 분배도 이루어지고 정의도 구현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성장만이 소비를 유지시켜주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엽 : 아.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허구성을 지적하시는 것 같군요. 저도 발전론에서 이러한 단선적인 발전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개도국의 발전에서 불가피하게 시발점에서의 집중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고착화 될 경우 낙수효과가 아닌 위쪽의 물만 자꾸 풍부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더군요. 저는 사실 그것이 권력과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요?

쟝 : 나는 그것이 본성적인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본성이라는 것도 사회의 운영구조에서 요구되는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죠. 성장을 해야 소비가 가능하고 소비가 되어야 현 사회체제는 운영이 가능하니까요. 생존의 문제란 말이죠.

엽 : 어렵군요. 보다 현실로 내려와서 이야기를 해 보죠. 현 정부가 경제발전을 모토로 내걸고 부자에 대한 감세정책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기업이 잘살고 경제가 커지면 국민이 잘 살게 된다는 논리인데요. 많은 국민들이 이 말을 믿고 있습니다. 지금 정부에 대한 반발도 결국 경제가 실제로 안 살아나고 있기 때문인데, 만약 경제의 파이가 커졌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쟝 : 바로 그것이 허구라는 말입니다. 성장이라는 매커니즘 속에는 왜곡의 과정이 녹아 있습니다. 그 왜곡의 비율은 성장에 따라 오히려 커지게 되지요. 이는 분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빈곤과 궁핍을 가속화 합니다. 현 정부가 경제를 부흥시켰더라도 빈부격차는 확대되고 낙수효과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엽 : 하지만 정치학에서 민주화이론에 따르면 최소한의 경제발전이 없을 경우 민주화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도 배고프면 공자님도 예의를 차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죠. 파이가 커지면 굶어 죽는 아이가 최소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수입은 얻을 수 있지 않나요? 현재 아프리카의 발전도식 또한 그러한 형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쟝 : 물론 의도하지 않게 발생하는 부수효과가 발생할 수는 있죠. 경제학적 용어로는 ‘외부효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의도를 고려해 볼 때 그 성장은 지배계급의 욕구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장’의 환상을 투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경제성장에서 드러나는 민주화는 지금을 구성하는 현 체제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합니다.

엽 :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 대한 개발원조 또한 시장영역을 넓히고 개별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검은 속셈이 뒤에 있다는 말이군요.

쟝 : 당신도 현실주의자지요?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면서 왜 묻나요.

엽 : 좀 씁쓸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정말 인간의 존엄과 인류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쟝 : 재미있군요.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존엄과 인류에 대한 애정은 왜 필요한 것이죠?

엽 : 글쎄요.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기아나 전쟁 가난한 이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잖아요. 제 마음이 불편한 것을 덜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쟝 : 바로 그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행복하기 위해서 라는 거죠. 남들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의 불편함 없는 상태로 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 또한 신화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성향이 아닙니다. 행복의 신화는 평등의 신화를 구체화해서 표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지요. 사물과 기호로 측정할 수 있는 물질적인 안락에 도달하는 것이 평등이고 곧 행복입니다.

엽 : 하지만 제가 말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잖아요. 마음의 문제라구요.

쟝 : 흠… 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마음은 왜 불편해지죠? 아마도 가난과 빈곤과 전쟁이 불행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경험적인 획득일 수도 있고 교육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너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외부기제에 의한 획득이라는 점이지요. 당신이 가난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해야 성장에 몰두할 것이고, 성장에 몰두해야 소비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엽 : 아. 마치 일본이 한국을 보다 더 잘 수탈하기 위해서 철도나 전기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설치한 것과 같군요. 하지만 너무 음모론 같은 느낌이 있는데…  기아나 빈곤, 전쟁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끔찍한 것이라고 인식하잖아요.

쟝 : 아니지. 정글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글리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빈곤이나 전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배고픔은 알지만 정의와 불의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서는 사회적인 구조 속에 있을 수 밖에 없기에 정의와 불의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엽 : 저는 행복을 그런 구조화된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본성적으로 마음이 편하게 되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쟝 : 그건… 당신이 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보다 편한 것,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맛있는 것,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을 때 행복하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사라지게 되고 자신이 소유한 것 보다 좋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지요. 끊임없이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고리, 특히 남과의 비교에서 발생하는 차이에의 욕구가 행복이라는 환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에 대한 환상은 소비를 촉진하는 것이고.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으로 기능하지요.

엽 : 결국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도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말이 되나요. 저는 꿈도 자아실현도 사랑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좀 허망하군요. 하지만 한편으로 쟝 선생께서 정의하는 행복은 기계론적인 행복이 아닐까 싶은데… 어떤 기호화된 가제트로서의 행복이랄까요?

쟝 : 그건, 언어라는 것이 불완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개인적인 정의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맥락을 고려해서 사고해야 합니다.

엽 : 진실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글에서 쟝 선생님은 진실과 객관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저는 fact 로서의 사실은 존재하고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진실이 구성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입니다만…

쟝 : 제가 말하는 진실은 미디어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TV나 녹음기, 신문의 활자가 의미하는 것은 사건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만을 말해주는 것이죠.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환시”에 가까운 것입니다.

엽 : 재미있군요. 존재론적으로 그곳에 없었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있던던 사실이나 그 사실을 경험한 기자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리인으로서 그들은 하나의 진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요?

쟝 : 아니. 저는 현실이 미디어를 거치는 순간 현실은 사라진다고 봅니다. 미디어가 형체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죠. 마치 매트릭스와 같은 세상이랄까?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구성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엽 : 굉장히 메타 인지적이군요. 하지만 실재한다는 것. 오감을 통해서 인지하는 것만이 인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TV에서 보여주는 가자지구의 전쟁이 구성된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완벽하게 100% 싱크된 사실을 알 수는 없더라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사실에 근접한 진실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쟝 : 바로 그것입니다. 아까 전에 전쟁을 보고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가자지구의 전쟁을 이야기 했구요. 가자지구의 전쟁은 구성된 것입니다. 언론에서 생산하고 시청자가 소비하고 있지요. 이것은 인간애의 문제가 아니라 호기심의 문제입니다. 시청자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닌 뉴스의 소비자로서 전쟁을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터에 있지 않다는 사실. 현실세계의 거리에 의해 우리는 평온을 재인식하고 안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을 보도하는 뉴스가 하는 ‘소비’적인 역할이죠. 실제로 이라크전을 보는 미국인들은 그것을 게임을 대하듯이 바라보았고 그 폭력을 소비하지 않았나요?

엽 : 잠깐만요. 굉장히 저널리즘에 대한 의도를 곡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마치 뉴스나 보도가 광고처럼 소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는 저널리즘이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확장을 보장하는 측면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전쟁을 좋아하고 바라보고자 해서 기자들이 전쟁을 취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전달해 주어서 그것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함이지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실재로 인식하고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윤곽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수함에게 잠망경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바다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제한된 프레임으로 제한된 지역밖에 보여주지 못하지만 잠망경은 자신이 존재할 수 없는 물 밖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저널리즘의 역할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요?

쟝 : 당신. 좀 흥분했군요. 나는 저널리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사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사실 인간이 외부세계의 폭력과 비 인간성을 즐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이 도전이 아닌 안전을 선택했다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외부의 불안감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당신이 말한 방식대로 말하면 잠망경을 통해서 바다 밖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바다 속에 있길 잘했다고 안도하는 것과 같은 심리겠죠.

엽 : 하지만 전쟁에 대해서 반대하고 ‘반전’물결을 이끌어 낸 것 또한 언론이고 미디어지 않습니까. 베트남전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68운동이나 반전운동을 이끌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쟝 : 그 또한 외부효과일 뿐.

엽 : 그렇군요. 그럼 다시금 논의로 돌아가서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도록 하죠. 쟝 선생님께서는 책에서 사회학적인 기호체계로서 ‘소비’를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소비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소통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소비를 행하는 소비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쟝 : 맞습니다. 소비자로서 개인은 물상화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소비하기도 하고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소비의 주체와 소비의 객체가 구별이 안가는 것이 소비사회의 특징이죠.

엽 : 그렇군요. 대중으로서 소비자가 소비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이제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광고나 마케팅으로 일방적인 소비를 강요받던 시기를 넘어 소비자의 연대가 가능해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는 소비자의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인터넷기반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소비가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죠. 구매자는 상품평이나 구매후기등에 기반해서 주체적 소비를 할 수 있고, 대중매체에 저항해서 1인 미디어로서 저널리즘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프로슈머(Prosumer)가 탄생한 것이죠. 물론 노이즈도 존재하겠지만 소비가 일방적이라는 것은 지금 사회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쟝 : 지금은 제가 책을 쓰던 시기와 달라졌으니 그 기반이 바뀔 수도 있지요. 하지만 민중이 민주주의 속에서 머물러 안주하는 한, 즉 정치 사회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로부터 찬양 받듯이 대중과 여론이 소비에 만족하는 한 소비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더 이상 소비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까지 담당하며 사회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르지요.

엽 :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군요. 저 또한 촛불의 경험이나 지금의 저항의 경험이 출발이자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민주주의의 소비사회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계기이자 출발점이지요.

쟝 : 그렇지요. 하지만 사실 속내를 털어 놓자면 저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논의들이 그다지 신뢰할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은 사유가 결여된 상황에서 유희를 목적으로 소비가 이뤄지는 곳이니까요.

엽 : 인터넷이 유희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쟝 : 인터넷은 거의 동시적인 접속과 공유가 발생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인터넷의 기반적인 속성이구요. 이 기반에서 실제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은 모두가 유희적인 것입니다. 인터넷에 가십이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흐름들, 그리고 만화, 동영상 등 등 모든 것이 유희에 기반을 두고 있지요.

엽 : 아. 웹툰 같은 느낌인가요? 저도 웹툰 같은 것은 즐겨봅니다만… 단순히 유희가 아닌 창조일 수도 있지 않나요? 특히 예술 같은 영역에서는 말입니다.

쟝 : 웹툰이나 팝아트 같은 것들은 예술이 아닙니다. ‘팝’을 생각해 보면 결국 ‘팝’이 추구하는 바는 문명에 내재하며 세계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업주의에 불과하고 놀이도 리얼리즘도 무엇도 아닙니다.

엽 : 유희가 유희라는 속성만이 아닌가요? 말씀하신 바는 유희라는 속성도 결국 상업주의, 소비되기 위한 당의정 같은 뉘앙스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쟝 : 그렇습니다. 우리시대에 문화는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르시클라주’입니다. 예술은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유행화하고 그 유행을 통해서 소비가 촉진됩니다.

엽 : 아. 마치 서울에서 열리는 고흐, 모네, 마티즈 전시회에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쟝 : 네. 고흐의 작품은 예술입니다. 소비와 관계없이 혼과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술이 산업적 생산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본질은 같되 그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 고흐의 작품을 산업화한 것이지요. 결국 지금의 문화는 ‘공업화된 문화성’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엽 : 물론 고흐나 모네, 마티즈 전시회에 가는 사람이 산업의 허구에 속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교양이라는 타인과 구별되는 가치에 대한 허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스노비즘(snobbism)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양태들이 만연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스노비즘이나 키치 또한 나름의 예술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쟝 : 그것은 예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대중은 예술이나 문화를 본질적인 측면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기호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 기호의 체계를 조합하며 놀고 있지요. 이런 점에서 문화가 유희의 소비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엽 :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화에 대한 인식도 시대적 맥락에 맞게 변하지 않을까요? 쿠텐베르크 이전까지 책은 지식인과 귀족의 소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활자’의 발명이후 지식은 공유되고 사고는 그 축적성을 기반으로 진보했습니다. 문화와 예술 또한 이러한 대중화가 기여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돈을 주고 책을 사서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이 저급한 것은 아닙니다. 미술이나 예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감성적 교양을 위한 소비가 적은 비용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 아닙니까?

쟝 : 저는 그 본질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지금의 팝은 소비를 조장하는 상업주의의 공범자에 불과합니다. ‘가제트’라고 부르지요. 예술이 가지고 있던 목적성과 유용성은 상실되고 그 유희성만이 강조된다는 말입니다. 유행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사람을 소비하도록 하는 가속장치 같은 것이지요. 본질이 사라진 상태에서 교묘하게 조작되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지요.

엽 : 너무 높은 부분에서 말씀하시니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저로서는 답하기 어렵네요. 제 생각은 예술은 예술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상업주의가 그것을 객체화해서 판매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수용자가 꼭 소비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수용자는 돈을 내고 예술을 보지만 그것은 관점에 따라 관람이나 문화의 영위로 볼 수도 있죠. 돈을 지불하는 것이 모두 소비는 아닙니다. 예술론은 예술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고 돈에 대한 이야기는 시장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요?

쟝 : 우리는 그것이 분리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인간(I home-consommateur)으로서 소비가 일상화된 쇼핑의 도시에 살고 있지요. 시간도 감정도 소비하며 끊임없는 드럭스토어의 일상. 도시는 소비가 가장 효율적으로 구성된 공간입니다. 도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기, 욕망, 만남, 자극, 타인의 끊임없는 판정, 성욕의 자극, 정보, 선전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보편화된 경쟁이라고 하는 현실의 기반에서 집단적 참가라는 일종의 추상적 운명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엽 : 그 말을 하시니 최근에 유행하는 칙릿(chic-lic)소설이 생각나는 군요. 미국의 <쇼퍼홀릭> 같은 소설이나 우리나라의 <달콤한 나의 도시>, <스타일> 같은 소설들이 그러한 도시적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소비자들은 소설 속에 대한 주인공들에 감정이입하며 위로 받기 위해 소설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도 소설가들은 현실적 세태에 대한 본질을 꿰뚫었겠죠.

쟝 : 소설은 좋아하지 않아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엽 : 그렇습니까? 선생님께서도 조금은 이 소비의 세상에서 인생을 즐기셔도 될 텐데… 너무 어렵게 사시는 군요. 오늘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쟝 : 네. 감사합니다. 몇 권 팔리지도 않은 <소비의 사회>를 읽어주시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엽 : 청취자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와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견해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쟝 선생님께서는 사회의 구성과 그 의도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분명 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더럽고 추악하고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내려와서 바라보면 인간이 살고 있고 사랑하고 있으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메타를 견지한다는 것. 좋은 시각이지만 조금은 슬픈 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에서 최대한 쟝의 의도는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근거해서 썼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를 잘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대화체로 구성하다 보니 맥락상 약간 곡해가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고 쟝의 논리가 이상하다. 혹은 그의 철학과 전혀 다르다 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지적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용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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