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 서평 \"세상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과학혁명의 구조 토머스 새뮤얼 쿤 | 김명자 옮김 까치글방(까치) 2002.11.05 <세상 모든...
<과학혁명의 구조> 서평 "세상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2009. 3. 18. 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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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새뮤얼 쿤 | 김명자 옮김
까치글방(까치) 2002.11.05
<세상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수학문제처럼 정답이 있다면, 공식대로 살아가면 정답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인생에 정답은 없다. 청와대서 큰 소리치는 대통령님도 찬이슬 맞고 주무시는 노숙자 님도 인생이라는 문제를 끝없이 풀어가고 있을 뿐이다.
‘감히 대통령님과 노숙자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다니!’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당신은 무슨 근거로 대통령이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어린왕자> 서평에서도 말한 것처럼 개인은 각자의 ‘별’속에 살고 있고 그 별에서는 누구나가 ‘어린왕자’이다. 어린왕자가 ‘순수성’을 술주정뱅이에게 강요한 것처럼 당신도 노숙자에게 ‘근면함’과 물질적 가치의 위대함을 말할 것인가?
<과학구조의 혁명>에서 토마스 쿤(이름이 귀엽다. 쿤. 쿤. 그렇쿤)도 ‘정답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명확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과학마저도 하나의 패러다임 속에서 구성된 제한적 ‘정답’일 뿐이다. 정답은 제한과 가정 없이는 성립하지 않고 패러다임 밖에 존재하는 문제는 풀 수 없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답’을 포기하고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 결국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발전’만이 있다는 말이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견해다. 하지만 과학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쿤 vs. 포퍼 논쟁 그리고 깨달음>
과학철학에서 쿤의 생각은 다양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쿤 vs. 칼 포퍼(라카투스)’ 논쟁은 뉴욕양키즈와 보스턴레드삭스의 경기만큼이나 유명한 논쟁이다. (말싸움이 뭐가 재미있냐고 물으신다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시라 논쟁만으로 영화도 만들 수 있다.)
쿤과 실증주의자, 그리고 쿤과 포퍼,라카투스와의 논쟁은 서로 논리의 빈틈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인 동시에 지적인 유희이다. 서로에게 맞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이들의 논쟁은 변증법적으로 서로의 발전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도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하지만 나더러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은지 물으신다면 나는 황희정승이 될 수 밖에 없다. “오냐, 쿤 너도 옳고 포퍼 너도 옳다.”
필자는 ‘양시론’이나 ‘양비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는 각론에서 대립항을 가지지만 대승적 의미에서 고민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양쪽이 옳을 수도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제대로 된 방식으로 풀이를 하고 있다면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양쪽이 옳을 수 있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이렇다. 이들은 불가의 수행방식과 유사한 논쟁을 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2가지의 수행방식이 있다. ‘선종’의 수행과 ‘교종’의 수행. 선종은 ‘돈오(頓悟)’라고 하여 문득 깨닫는 과정을 중시한다. 반면 교종은 ‘점수(漸修)’의 과정을 중시하는데 이는 차근차근 교리를 배워나가 서서히 ‘앎’에 이르는 과정을 뜻한다. 어느 쪽이건 그 수행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쪽이건 깨달음 뒤에는 또 다른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택하더라도 깨달음을 향한 끊임 없는 수행이라는 ‘과정’이다.
쿤을 둘러싼 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과학이 축적에 의해 진보해 가는 과정이냐, 돈오! 를 통해서 극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이냐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양쪽이 모두 절대 진리를 상정하지 않고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정은 늘 진보하는 것일까?>
쿤과 실증주의자들은 이 ‘과정’을 진보(Progress)라고 생각했다.(물론 쿤은 이전 과학을 미신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다 너그럽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진보(進步)일까? 일반적으로 진보라는 단어에 담긴 함의는 더 나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과학이 추구하는 과정은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정’은 ‘과정’일 뿐이다. 망망대해에서 노를 저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진리’가 없는데 진보는 과연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마치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어이~ 다 와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나는 과정에는 ‘방향’만이 존재하고 그 방향은 진보를 향할 수도 퇴보를 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키(note)’를 통해서 방향설정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 ‘키’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인 ‘합의’이며 ‘동의’다. 이 합의는 공론(public opin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정의 justice’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의 또한 진리와 마찬가지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시대와 맥락에 맞게 형성되는 ‘공론’을 키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보자. ‘원자력(핵)’ 연구가 있다. 이런 자연과학적 연구는 단순히 자연과학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존, 유전자 변형의 위험, 방사능 노출 가능성, 님비 현상같은 사회의 영역에 모두 걸쳐져 있다. 결국 과학이 그 쓰임과 무관하게 중립적이라는 말은 이슈가 다차원의 매트릭스 위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다름 없다. 공론화가 되지 않은 채로 ‘핵’을 자유롭게 연구한다고 하자. 모두가 ‘핵’을 가지게 되었다. 방사능 노출의 위험은 늘어났고, 핵전쟁의 위험은 더 커졌다. 인류멸망의 시계(Dooms day clock)는 12시가 되기 직전이다. 과연 우리는 진보하는 것일까?
<전환시대의 논리>
앞선 이야기에서 세상 모든 것은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했다. 또 그 ‘방향’은 ‘공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공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옳다는 말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금 쿤의 ‘패러다임’의 개념이 개입한다. 우리가 키라고 생각한 ‘공론’이 사실은 패러다임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면? 다시금 쿤의 의견을 빌리자면 특정한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세계관을 넘어설 수 없다. 마치 특정 패러다임 속에서 ‘정상과학’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처럼 우리는 다른 패러다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속에서 ‘수수께끼’에 대한 질문은 배제되고 우리는 단순히 문제풀이에 천착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틀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나 ‘시장’을 주어진 상수라고 인식하고 그 안에서 선택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정답은 아니라는데 있다. 우리 입으로도 민주주의는 차선의 체제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세계적 ‘금융위기’에 당면해 있다. 이것은 특정 패러다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우리가 다가오는 패러다임의 한계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쿤 식으로 말하면 ‘정상과학’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금 ‘정상과학’의 테두리 속에서 이 ‘위기’를 논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것인가? 쿤이라면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혁명(Revolution)의 구조이고 진보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쿤의 입장에 가깝다.) 하지만 가 보지 않은 길을 정답이라고 확신 할 수는 없다. 그 길이 오히려 퇴보의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 자본주의를 넘어 공산주의 패러다임을 채택했지만 결국 그것은 퇴보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급하게 현재의 체제종언을 고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공론’을 모아야 한다. 지금의 위기를 직시하고 현재 패러다임이 가진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한 후 대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예상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에 의한 방향설정은 ‘과정’적 정의를 보장한다. 모든 것은 ‘과정’이 아니었나? 미래를 알 수 없다면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과정’이 모여서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유연한 사고로 패러다임을 넘나들며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