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브를 쥔 자가 묻는다 — 미국·이란 전쟁에서 Fable 5까지
1973년 오일쇼크의 밸브가 2026년 AI로 옮겨왔다. 미국의 Fable 5 차단은 통제의 단위를 국가에서 개인의 국적까지 끌어내렸다. 잠그는 자가 묻는다 —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우리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26년 3월 호르무즈 해협이 닫혔다. 전 세계 석유의 5분의 1이 지나던 길이다. 유가는 배럴당 120달러를 넘겼고, 카타르에너지는 모든 수출에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 사태를 "글로벌 석유시장 역사상 최대 공급 차질"이라고 불렀다. 각국은 한 번도 쓴 적 없던 보조금에 수출통제 카드까지 써가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53년 전인 1973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4차 중동전쟁 직후 OPEC 아랍 회원국들은 원유 생산을 줄이고 이스라엘 지원국에 석유를 끊었다. 배럴당 3달러대였던 원유는 몇 달 만에 12달러로 4배 뛰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두 자릿수를 자랑하던 경제성장률이 이듬해 2%대로 주저앉았고, 물가는 40% 넘게 치솟았다. 1979년 이란 혁명이 불러온 2차 오일쇼크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유가는 다시 2배 넘게 뛰었고, 상반기 10%를 넘던 성장률은 하반기에 절반 가까이 꺾였다.
반세기의 간격을 두고, 같은 구조의 위기가 다시 온 거다.
반세기를 가로지른 같은 구조의 위기
| 시점 | 밸브를 쥔 자 | 무기화 수단 | 한국이 받은 타격 |
|---|---|---|---|
| 1973 · 1차 오일쇼크 | OPEC 아랍 회원국 | 생산 감축 + 금수 | 성장률 두 자릿수 → 2%대, 물가 40% 폭등 |
| 1979 · 2차 오일쇼크 | 이란 혁명정부 | 생산 대폭 감축 | 유가 2배 이상↑, 하반기 성장률 반토막 |
| 2026 · 미국·이란 전쟁 | 미국·이란 군사 충돌 | 호르무즈 해협 봉쇄 | 유가 $120 돌파, IEA "역사상 최대 공급 차질" |
오일쇼크가 가르쳐 준 것은 단순한 경제 교훈이 아니었다. 그건 정치학에서 말하는 힘, 권력(Power)의 작동 방식이었다. 자원을 가진 쪽이 밸브를 잠그는 순간, 가지지 못한 쪽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술도, 외교도, 시장 논리도 그 앞에서는 무력했다. 가격은 시장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있는 자가 정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란 전쟁은 그 교훈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과 이란이 60일 휴전 연장을 담은 양해각서(MOU)에 합의했다는 소식에 유가는 고점 대비 20% 빠졌다. 하지만 영구 평화의 향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트럼프는 언제 어떤 말을 할지 모르고, 네타냐후는 권력을 이어갈 수 있다면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 수억 명의 일상이 몇 사람의 결정에 좌우되는 거다.
우리는 이 시나리오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재미있는 건 지금 똑같은 구조의 위기가 전혀 다른 자원을 두고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엔 석유가 아니다.
밸브는 유전에서 팹으로 옮겨갔다
이번에 잠그는 것은 석유가 아니라 연산이다.
2019년 5월, 미국은 화웨이를 수출통제 명단(Entity List)에 올렸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가 미국 기술이 들어간 부품을 살 수 없게 됐다. 2020년 12월에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SMIC가 같은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2022년 8월, 바이든 행정부는 527억 달러를 자국 반도체 산업에 쏟아붓는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서명했다. 같은 해 10월, 14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와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았다.
여기까지는 중국의 부상을 우려한 미국의 단독 플레이처럼 보였다. 흔히 패권전이를 막기 위한 일극 국가의 몸부림은 치열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통제는 곧 동맹으로 번졌다. 2023년 7월, 일본이 고성능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에 동참했다. 네덜란드의 ASML도 같은 대열에 섰다. 포위가 좁혀지자 중국은 맞불을 놓았다. 갈륨과 게르마늄 같은 반도체와 전자제품의 핵심 광물 수출을 제한했다. 중국은 전 세계 갈륨의 90%, 게르마늄의 60%를 생산한다. 서로 자원을 무기화한 거다.
통제의 칼끝은 점점 AI로 향했다. 2023년 10월과 2024년 12월, 미국은 수출통제 수위를 높이며 엔비디아의 A100·H100, 그리고 차세대 블랙웰 GPU까지 묶었다.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추론하는 데 쓰이는 칩이다. 여기에 AI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까지 통제 대상에 들어갔다. 2025년 3월 트럼프 행정부는 수십 개의 중국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추가로 올렸다.
기술 통제의 하강 — 칩에서 신원까지
| 시점 | 무엇이 잠겼나 |
|---|---|
| 2019.05 | 화웨이 Entity List 추가 — 미국 기술 부품 구매 차단, 설계 레이어 봉쇄 시작 |
| 2020.12 | SMIC(중국 최대 파운드리) 추가 — 제조 레이어로 확장 |
| 2022.08 | CHIPS·과학법 서명(527억 달러) —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 |
| 2022.10 | 14nm 이하 첨단 반도체·장비 수출통제 — 학습용 GPU 생산능력 직접 겨냥 |
| 2023.07 | 일본·네덜란드(ASML) 동참 / 중국, 갈륨·게르마늄으로 맞불 |
| 2023–24 | A100·H100·블랙웰 GPU + HBM 통제 강화 — 인프라 레이어로 하강 |
| 2025~ | Fable 5 차단 — 신원 레이어로. 통제 단위: 국가 → 상품 → 개인 |
한 발 떨어져 흐름을 보면 구조가 보인다. 통제는 칩에서 시작해 장비로, 메모리로, AI 모델 그 자체로 확장됐다. 오일쇼크나 최근 이란의 전술이 "원유를 잠근다"는 심플한 형태였다면, 지금의 기술 전쟁은 스택의 모든 층위에서 동시에 밸브를 조인다.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메모리, 학습용 칩, 그리고 모델 접근권까지 말이다. 어느 한 곳만 막아도 위에 쌓인 모든 것이 멈춘다.
오일쇼크가 50년 전 한차례의 충격이라면, 기술 패권 전쟁은 매년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며 진행되는 상시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의 최전선이 바로 AI다.
미국 정부의 Fable 5 차단은 그 최전선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Fable 5는 단순히 더 똑똑한 모델이 아니다. 긴 코드베이스를 끝까지 따라가고, 복잡한 작업을 오래 붙들고, 사람이 계속 다시 깨워줘야 하던 구간을 확연히 줄인 모델이다. 도구가 아니라 일을 맡길 수 있는 동료에 가까웠다. 그런 모델이 공개 사흘 만에 잠겼다. 명분은 탈옥(jailbreak) 대응과 중국 모델의 증류(distillation) 차단이었지만, 차단의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국적이었다. 대상도 특정 국가가 아니라 "모든 외국 국적자"였다. 결제 수단이 있어도, 회사 이메일이 있어도, API 키가 있어도, 마지막에 여권을 물었다. 미국 안에 있는 외국인도 불가. 심지어 Anthropic 회사 내부의 외국 국적 직원까지 걸렸다.
여기서 통제의 성격이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 보인다. 석유는 누가 사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돈을 내면 배에 실렸다. 칩도 결국은 물건이라, 어디로 가는지를 통제했다. 그런데 AI 모델 접근은 누가 쓰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통제의 단위가 국가에서 상품으로, 다시 개인으로 내려온 것이다. API 키 위에 여권이 올라온 순간, 지능에 대한 접근권이 국적이라는 근대적 발명품에 종속된 것이다.
잠글 수 있는 권력이 이제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묻는다. 유전에서 시작된 밸브가, 데이터센터의 GPU를 지나, 마침내 개인의 신원까지 온 것이다.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르다
여기까지 보면 AI는 새로운 석유처럼 보인다. 잠그는 자가 있고, 잠기는 자가 있고, 그 사이에서 한국 같은 나라는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석유와 AI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석유 vs AI — 닮은 구조, 다른 변수
| 구분 | 🛢 석유 (1973~) | 🤖 AI (2019~) |
|---|---|---|
| 대체재 | 없다. 땅에서 안 나면 끝 | 오픈웨이트 모델 존재. 한번 풀리면 못 거둔다 |
| 통제 단위 | 국가 → 국가 (금수) | 국가 → 상품 → 개인 신원으로 정밀화 |
| 탈출구 | 없다. 의존이 운명 | 있어 보이지만 GPU·TSMC·ASML이 막혀 있다 |
| 한국의 선택지 | 비축유, 소비 절감, 버티기 | 레이어별 헤징 — 모델·인프라·거버넌스 |
석유에는 대체재가 없었다. 중동이 밸브를 잠그면,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비축유를 풀고 소비를 줄이며 버티는 것뿐이었다. 땅에서 안 나는 자원을 갑자기 만들어낼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미국이나 다른 산유국의 생산량이 늘어나서 리스크를 분산하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역시 밸브를 쥔 자들은 제한적이다.
AI는 다르다. 막힌 모델 옆에 열린 모델이 있다. 미국이 최상위 모델을 잠가도, 오픈웨이트 모델은 다운로드받아 내 서버에서 돌릴 수 있다. 가중치가 공개된 모델은 회사가 망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암호 기술이 수출통제를 뚫고 코드와 논문으로 퍼져 인터넷의 기본값이 됐듯이, LLaMA의 가중치가 유출된 뒤 로컬 추론 생태계가 폭발했듯이, 한번 풀린 모델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잠그는 속도는 퍼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다. 이것이 석유에는 없던, AI만의 탈출구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기술의 확산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도 맹점이 있다.
오픈 모델을 손에 쥐어도, 그것을 돌리려면 GPU가 필요하다. 그 GPU는 엔비디아가 설계하고, TSMC가 만들고, ASML의 장비로 찍어낸다. 모델을 학습시키고 추론하려면 막대한 전력과 데이터센터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델 레이어의 문이 열려 있어도 그 아래 인프라 레이어의 문은 여전히 몇몇이 독점하고 있다. 수출통제가 칩과 장비와 메모리를 겨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은 모델만 잠그는 게 아니라, 모델을 돌리는 토대를 잠근다.
그래서 오픈소스는 탈출구인 동시에 또 다른 의존이다. 모델은 공짜로 풀려 있지만, 그 모델을 쓸모 있게 만드는 연산은 공짜가 아니다. 자원 민족주의 시대에 "우리도 정유공장을 지으면 된다"고 했지만 원유 자체는 여전히 수입해야 했던 것과 같다.
진짜 교훈은 여기에 있다. 기술은 국경 없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은 언제나 국경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평소에는 오픈소스와 글로벌 커뮤니티와 분산 인프라가 국경을 지워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 특정 정부가 개입하면 그 환상은 한순간에 깨진다. 칩이 있어도 못 사고, 모델이 있어도 못 돌리고, 키가 있어도 여권 앞에서 막힌다. 20세기적 주권이, 가장 탈국경적으로 보이는 기술의 핵심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버린 AI.
그동안 이 말은 기술 민족주의 구호처럼 쓰였다. "우리도 우리만의 LLM, AI를 갖자"는 선언. 하지만 오일쇼크에서 Fable 5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우리가 '소버린 AI'를 좀 다른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핵심은 모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겼을 때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원 주권이 유전을 갖는 문제가 아니라 공급이 끊겨도 경제가 돌아가게 만드는 문제였듯이, AI 주권도 최고 모델을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곳이 밸브를 잠가도 핵심 업무와 기술 발전이 이어지게 만드는 문제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만의 모델을 가질 것인가"가 아니다. 밸브가 잠기는 순간, 우리에게 다른 밸브가 있는가. 소버린 AI는 자립의 문제라기보단 '교토삼굴(狡兔三窟)'의 문제일지 모른다.
불화수소에서 GPU까지
이 시나리오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국은 이미 두 번, 밸브가 잠기는 경험을 했다.
2019년 7월, 일본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의 핵심 소재 세 가지 —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 의 한국 수출을 틀어막았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이었다. 정치가 통상의 밸브를 잠근 것이다. 당시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불화수소 44%, 포토레지스트는 무려 92%였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 자체가 멈출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그제야 뛰기 시작했다. 소부장 특별법을 만들고, 100대 핵심 품목 국산화에 매년 1조 원을 쏟았다. 결과는 괜찮았다. 불화수소의 일본 수입액은 6분의 1로 줄었고, 일부 품목은 국산화에 성공했다.
성공담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수출규제가 풀리자, 국산화에 성공했던 기업조차 다시 더 싸고 익숙한 일본산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위기일 때만 자립을 외치고, 밸브가 다시 열리면 곧장 의존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거다. (시장 경제에서 교역이 보장되면 최적점을 찾아가는 건 당연하긴 하다.)
또 하나의 사례. 2017년,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은 한한령을 내렸다. 게임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중국에 게임 50여 종을 수출했지만, 2017년 3월 이후로는 단 한 건도 들여보내지 못했다. 세계 최대 게임 시장의 문이 닫힌 것이다. 다시 한국 게임이 중국 진출 허가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년 9개월. 그 사이 중국 게임은 한국 시장에서 자유롭게 흥행했다. 밸브는 한쪽 방향으로만 잠겼다.
일본은 소재의 밸브를, 중국은 시장의 밸브를 잠갔다. 그리고 둘 다 기술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었다. 강제징용 판결, 사드 배치처럼 한국이 통제할 수 없는 외교 변수가 산업의 생사를 갈랐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AI를 두고 벌이는 일도 같은 종류의 일이다. 다만 이번에 잠길 밸브는 소재도 시장도 아닌, AI 지능 그 자체다.
좀 다른 이야기도 있다.
2000년대 초, 한국이 네이버라는 자국 검색 포털을 지키려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구글이 세계를 평정하는 시대에 무슨 검색 주권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미국을 빼면 자국 검색엔진이 점유율 1위를 지키는 극소수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체코, 러시아, 일본, 중국 정도가 자국 검색엔진을 가진 나라다. 당시의 결정은 20년 뒤 중요한 국가 자산으로 돌아왔다.
네이버가 검색 1위를 지키는 동안, 그 안에는 방대한 한국어 데이터가 쌓였다. 뉴스, 블로그, 카페, 지식iN 등을 통해 쌓인 수십 년치 한국어 말뭉치다. 그리고 이 축적이 하이퍼클로바X 같은 한국어 특화 거대 언어모델의 학습 기반이 됐다. 만약 한국의 디지털 라이프가 통째로 구글 위에서 돌아갔다면, 이런 데이터는 갖지 못했을 거다. 소버린티는 미래를 위한 자산이었다.
소재도, 시장도, 데이터도, 잠길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시점에는 잠긴다. 그때 무너지지 않은 쪽은 미리 다른 밸브를 마련해 둔 쪽이었다. 한국은 대체로 위기가 터진 뒤에야 움직였지만, 검색 주권 쪽은 꽤 괜찮은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이번 AI 이슈에서는 어떨까? 잠기기 전에 다른 길을 깔아둘 수 있을까.
허브가 되는 나라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만의 거대 모델을 만든다? 그건 가장 비싼 밸브 하나를 직접 엄청난 투자를 통해 만들겠다는 말이다. 진짜 목표는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어느 밸브가 잠겨도 일이 멈추지 않는 구조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건 세 개의 층에서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소버린 AI의 3층 구조
| 층위 | 핵심 역량 | 한국의 현재 위치 |
|---|---|---|
| 모델 층 | 갈아 끼울 수 있는 능력 (eval·파인튜닝) | HyperCLOVA X, 오픈소스 파인튜닝 생태계 초기 |
| 인프라 층 | 모델을 돌리는 토대 (메모리·추론 칩) | HBM 세계 선도, 퓨리오사·리벨리온, 초고속망 |
| 거버넌스 층 | 복제 불가능한 축적 (도메인 온톨로지·데이터) | 산업 데이터, eval 운영 경험 |
첫째, 모델 층이다. 자체 모델 하나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다. 미국 모델, 중국 오픈웨이트, 한국 모델을 상황에 따라 갈아 끼울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모델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모델이 바뀌어도 품질을 측정하고 갈아 끼울 수 있는 역량이다. 평가 체계(eval)와 파인튜닝 능력 같은 것. 한 모델이 막히면 다른 모델로 즉시 전환할 수 있을 때 차단 협박에 휘둘리지 않고 대안을 만들 수 있다.
둘째, 인프라 층이다. 여기가 한국이 가장 할 말이 많은 자리다. AI를 돌리는 일은 결국 메모리와 추론 칩 위에서 일어나고, 한국은 세계 메모리 시장의 중심에 있다. HBM은 이미 한국이 쥔 밸브다. 여기에 추론에 특화된 국산 AI 칩(퓨리오사나 리벨리온 같은)이 더해지면, 한국은 "모델을 빌려 쓰는 나라"에서 "모델을 돌리는 토대를 가진 나라"로 올라선다. 남이 만든 지능이라도 내 인프라 위에서 돌아간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협상 카드다.
셋째, 운영과 거버넌스 층이다. 어떤 일에 어떤 모델을 써야 하는지, 민감한 데이터는 어디서 돌려야 하는지, 규제와 산업별 관행을 어떻게 반영할지 같은 판단들. 이런 판단의 축적이 가장 복제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특히 특정 산업의 개념과 용어, 규제와 관계를 구조화한 그 분야만의 온톨로지는, 모델을 증류로 베껴도 따라오지 않는다. 모델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매일 쌓이는 도메인 데이터와 업무에 박힌 인터페이스, 사람이 고친 흔적이 다시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루프, 그리고 그 산업을 이해하는 지식 체계는 쉽게 베낄 수 없다. (최근 사티아 나델라가 말한 Human capital vs. Token capital도 비슷한 맥락일 듯하다.) 앞으로의 해자는 무엇을 잠그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축적하느냐에서 나온다.
이 세 층을 갖춘 나라는 닫아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열어서 강해진다. 미국이 Fable 5에서 보였듯 "당신은 외국인이라 쓸 수 없다"고 선을 긋는 순간이, 역설적으로 한국에는 기회다. 그때 한국은 "여기서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국적이 아니라 기여와 신뢰를 기반으로 참여를 만들어 내는 거다. 메모리와 칩, 빠른 네트워크, 안정된 민주주의, 그리고 실제 산업이 돌아가는 데이터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다.
네트워크에서 힘은 연결의 수에서 나온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노드는 스스로 아무리 강해도 고립된 점에 불과하고, 가장 많은 연결이 지나는 허브는 그 자리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든다. 통제는 한국을 고립된 노드로 만들 수도, 모두가 거쳐 가는 허브로 만들 수도 있다. 문을 잠그는 나라는 잠깐 우위를 얻지만 연결이 끊기며 점점 외딴 노드가 되고, 문을 여는 나라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가장 많은 흐름이 모이는 허브가 된다. 전 세계의 개발자와 기업이 한국의 인프라 위에서 만들고, 그 위에 또 다른 것을 쌓을 수 있다면. 연결이 늘어날수록 떠나기 어려워지기에, 잠그는 힘이 아니라 모이게 하는 힘이 필요하고, 그게 AI 시대 중심이 되는 길이 아닌가 싶다.
물론 한국이 3대 AI 강국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해보지도 않고 우린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 점이다. 정치인의 수사로 부풀린 'K-AI'가 아니라, 추론과 메모리처럼 우리가 진짜 잘하는 곳으로 전선을 좁힌다면, 승산은 분명히 있다.
50년 전 우리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였다. 그래서 정유 설비를 짓고, 원유를 들여와, 세계가 인정하는 정제 능력을 만들었다. 자원은 없었지만 자원을 다루는 능력은 가졌다. AI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모델은 우리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델을 돌리고, 갈아 끼우고, 쌓고, 신뢰하게 만드는 능력은 우리 것일 수 있다.
잠그는 자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허브는 그것을 묻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러 왔는가를 묻는다. 한국이 외딴 노드가 될지 모두가 거쳐 가는 허브가 될지,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