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팀을 만들었다
콘텐츠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만, 출발점을 누가 잡아주면 좋을 때가 있다. AI 쉐도우 팀과 3개월 일하며
콘텐츠 회의가 겉돈다는 느낌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안건은 있는데 발제가 없었다. 다들 자기 일이 바빴고, 회의는 보고의 자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획이라는 건 누군가 시간을 내서 뉴스와 소식을 살피고 트렌드를 계속 따라가야 나오는 건데, 그런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엔 각자가 맡고 있는 일이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보를 물어다 주는 것도 쉽지 않고, 아이디어를 쪼기만 하는 것도 답은 아니었다.
스탠드업은 실패했다
처음 팀을 맡고 작년 초에 꺼낸 카드는 스탠드업이었다. 예전 스타트업 동료들이 아침마다 짧게 모여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막힌 것을 공유하던 그 방식. 길어야 15분. 가볍게 아이디어를 쌓아두는 통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 몇 주는 내가 끌고 가며 트렌드 기사를 미리 던지고, 경쟁사 캠페인을 가져와 "이건 어때요" 물었다. 어느정도 다들 익숙해지고 좋은 아이디어, 이야기 될만한 스토리들이 쌓였다. 하지만 실제 액션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좋은 내용인 건 알겠는데, 그걸 내 일로 가져와서 욕심있게 끌고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스탠드업이라는 약속이 희미해져 갔다. 1년 반정도 끌고 오면서 다들 너무 익숙해졌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스타트업의 방식을 대기업 팀에 그대로 옮겨 심는 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스타트업의 스탠드업은 매일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동기화 하는 도구다. 우리는 각자 다른 과업에 매달리고 있었고, 매일 공유할 만큼 일이 겹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발제는 심리적 안전감이 있어야 나온다. 어설픈 아이디어를 꺼냈다가 "그게 되겠어"라는 반응이 한 번이라도 돌아오면, 다음부터 입이 닫힌다. 내가 의지를 북돋아도 보고와 결정까지 시간이 걸리고, 기존에 하던 걸 하지 왜 일을 벌리냐는 이야기를 듣기 쉽다. 형식을 바꾼다고 문화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팀원들이 역량이 없는 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다들 경력이 길고 업을 안다. 다만 매일의 일이 사람을 현재에 묶어두고, 관성에 젖게 한다. 경쟁사가 어제 무엇을 했는지, 지금 사회가 어떤 단어에 반응하는지를 들여다볼 여유가, 구조적으로 없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였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방향이 보였다. 사람을 다그칠 일이 아니었다. 발제가 안 나오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정보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 또한 마찬가지다. 80점의 일을 90점 이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0에서 80점을 만들라고 할 것이 아니라, 80점 짜리를 줄테니 그걸 90점으로 만들어 달라는게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리서치를 대신 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면 어떨까. 경쟁사 동향, 이번 주 화제,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를 미리 정리해두면, 회의는 '무엇을 찾을까'가 아니라 '무엇을 할까'에서 시작할 수 있다. 발제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일이다.
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기획은 한두 명이 잡고, 실행은 대행사와 함께 가는 구조의 비효율이었다. 기획자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이 대행사로 넘어가는 사이 많은 게 새고, 다시 맞추느라 시간이 들었다. 콘텐츠 하나를 웹, 영상, SNS로 펼치는 과정이 매번 즉흥적이었다.
생각이 한 곳으로 모였다. 사람을 더 뽑을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팀을 하나 더 두면 되겠다고.
그림자 팀, 가상의 동료들
소프트웨어 업계에 콘웨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조직의 소통 구조가 그대로 산출물의 구조가 된다는 이야기다. 분절된 조직은 분절된 결과물을 낸다. 거꾸로 읽으면, 내가 원하는 결과물의 모양대로 조직을 짜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과물의 모양대로 가상의 팀을 설계했다. AI 에이전트로 구성한 쉐도우 콘텐츠팀이다.
- 총괄 — 팀장 역할을 보조한다. 무엇을 언제 어떤 채널로 낼지 큰 그림을 잡고 나머지 역할에 일을 분배한다.
- 기획 — 아이템을 발굴하고 콘텐츠 시리즈 규격에 맞춰 기획안 초안을 짠다.
- 리서처 — 경쟁사·트렌드·데이터를 모아 회의 전에 올려둔다.
- 라이터 — 시리즈 포맷에 맞는 원고 초안을 쓴다.
- 교열·체크 — 브랜드 보이스와 금지 표현, 팩트를 점검한다.
- 멀티채널 — 핵심 원고 하나를 SNS·뉴스레터·영상 스크립트로 파생한다.
- 성과 모니터링 — 발행 후 지표를 모아 다음 기획에 되먹인다.
이건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대로 팀이 일 할 수 있게 방향을 잡아 주는 것에 가깝다. 기획자가 리서치·집필·파생·점검을 혼자 다 짊어지던 것을, 옆에 일곱 명의 동료가 붙은 것처럼 일하게 하는 방식이다. 아이디어가 있는 이에게 팔,다리를 추가해 주는 것에 가깝다.
한 분기를 돌려보다
이론만으로는 안 된다. 학습 재료가 필요했다.
작년에 창립기념으로 진행한 흑백사진전이 좋은 교본이었다. 단발 전시가 아니라 내부 커뮤니케이션부터 온라인 전개까지 여러 갈래로 뻗은 캠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획서, 채널별 전개, 반응을 그림자 팀에 학습시켰다. 하나의 코어 콘텐츠가 어떻게 여러 채널로 가지를 치는지, 그 문법을 익히게 한 셈이다.
올해는 그 문법을 아트 페스타 형태의 캠페인에 적용했다. 결과는 작년과 확실히 달랐다. 내부 공지, 웹 전시관 제작, 소셜 전개가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 어디서 빠뜨리고 있는지가 캠페인 초반에 보였다. 즉흥이 줄고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
부수 효과도 있었다. 에이전트들이 일을 나눠 받기 시작하자 팀원들이 콘텐츠의 짜임새와 일정 관리에 쓰는 품이 줄었다. 대행사에 기대던 비중도 눈에 띄게 내려갔다. 머릿속 그림을 외부로 넘기기 전에, 안에서 한 바퀴 굴려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기존에 있던 뉴스룸에 내용도 모두 학습 시켰다. 그리고 문제점도 분석해서 개선안도 만들어 우리의 지향점을 확실히 잡았다.
AI가 못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솔직히 이 그림자 팀은 완벽하지 않다. 보고서는 했던 분석을 또 하고, 최신 내용을 따라오는 듯 하지만 인사이트까지는 못 준다.
결정적으로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른다. 실제 취재를 못 하는 거다. 현장에 가서 사람을 만나고, 표정을 읽고, 질문 뒤에 따라붙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사내의 미묘한 기류, 누가 무엇에 민감한지, 어떤 메시지가 지금 나가면 안 되는지 같은 판단도 에이전트는 모른다. 결국 사람과 같이 일할 수 밖에 없고, 사람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
결국 human-in-the-loop는 타협이 아니라 설계의 출발점이 될 수 밖에 없다. AI가 초안과 분석을 맡고, 사람이 판단하고 책임진다. 개선과 방향에 대한 고민은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 이 경계를 흐리는 순간 시스템은 위험해진다. 에이전트가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대행사 의존을 줄인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게 되면, 밖의 시선을 들일 이유가 줄어든다. 외부 파트너가 가져다주던 낯선 관점, 안에서느 알 수 없던 조언은 효율이라는 말로 대체하기 힘들다. 우리가 AI로 뽑아 내는 10개의 제안을 모두다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팀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요즘 회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시작 전에 주간 리포트를 먼저 본다. 지난주 무엇이 잘 됐고 무엇이 묻혔는지, 다음 주 무엇을 내는 것이 좋을지 쉐도우팀이 의견을 냈다. 회의는 그 위에서 판단을 더하고, 아이디어를 더하며, 현실을 고려하는 자리로 바뀌고 있다. 완성형은 아니지만, 사람과 AI가 손을 맞춰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총괄 역할을 에이전트에 맡겨보면서 묘한 질문이 남았다. 팀장이란 결국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일을 나누고, 일정을 잡고, 품질을 점검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가상의 동료가 대신할 수 있다면, 사람 팀장의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내 잠정적인 답은 '무엇을 만들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를 정하는 일.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일'이 아닌가 싶다. 계속해서 배우고, 계속해서 체계화 하며 변화를 맞이 하는 일. 쉽지 않지만 즐거운 일이다.